북촌 가꾸기 기본계획 Pages 2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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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4 | 가회동, 재동 유길준 유배지(취운정) : 가회동1-5번지이며, 1885년 역적으로 몰려 7년간이 나 취운정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문화를 소개한 [서유견문 ( )]을 편찬했던 곳이다. 취운정( ) 활터 : 가회동 1번지 일대이며, 3.1독립운동 대표였던 손병희 선 생과 박동진. 오세창 등 독립투사들이 매일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하였던 곳이다. 일가정( ) 터 : 가회동 1번지 아래 부분에 위치하며, 장충단의 석호정( ), 마포의 화수정( ), 자지동( )의 청룡정( ),천연동( )의 서 호정( )과 함께 서촌( ) 5처사정( )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홍술해골 : 가회동 250번지이며, 정조( )때 황해감사 홍술해가 장물죄를 범하 고 섬으로 귀양가자 아들 상범( )이 함원하고 모반( )하다 처형된 후 홍술 해의 집에 못을 팠으므로 홍술해골 또는 못골이라고도 했었다. 완순궁( ) 터 : 가회동 91-171번지이며, 홍선대원군의 조카 완순군 이재완 의 집터였다. 현상윤( ) 집터 : 가회동 1-192번지이며, 고종 30년에 태어난 사학자이고 민족대표 48인중 한사람인 현상윤이 살던 곳이다. 능성위궁( ) 터 : 가회동 177, 178번지이며, 영조와 문숙사이의 소생인 화길옹주를 능서위 구민화( )에게 하가( )시켜 왕의 사위인 부마( )가 살던 곳이었다. 손병희( ) 집터 : 가회동 170-12번지이며, 3.1운동기념터이다. 구한말 천도 교의 지도자였고, 독립운동가였던 손병희 선생이 살던 곳이다. 박규수( ) 집터 : 재동 83번지(헌법재판소내)이며, 연암( ) 박지원( , 1737-1805)의 대를 이어 손자인 박규수(1807-1876)가 살던 곳이었고, 이완 용의 서형( )인 군부대신 이윤용( )이 소유하기도 하였다. 풍양조싸( ) 집터 : 재동 83번지(헌법재판소내)이며, 한성부 판윤을 비 롯 병조, 이조, 공조판서를 역임한 조상경( ,1681-1746), 구황작물인 고구 마의 종자를 대마도에서 구입 재배한 조엄( ,1719-1777) 이외에 조진관( , 1739-1808), 조만영 ( ,1776-1846), 조병준 ( , 1814- ?), 조성하( , 1845-1881), 조동면( )까지 7대에 걸쳐 이조판서를 계속한 신정왕후 ( ) 조씨( )의 친정 집터이었다. 산업은행관리 가 : 가회동 178번지이며, 서울시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백인제( ) 가 : 가회동 93-1번지이며,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민속자 료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이왕가의 조카 한상룡이 압록강의 흑송( )으로 지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김창녕위궁( ) 터 : 재동 5번지(한국병원터)이며, 순조의 둘째 딸 복 온공주( )를 창녕위( ) 김병주( )에게 하가( )한 곳이다. 광혜원( ) 터 : 재동 83번지(헌법재판소내)이며, 이윤용의 집을 개조하여 광 혜원이라는 왕립병원을 세워 1885년 2월 29일에 개원한 곳이다. 월남( ) 이상 재( )가 살기도 하였다. 재동의 백송 :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35번지 헌법재판소 내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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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5 | 안국동, 화동 감고당( ) 터 : 안국동 36번지이며, 덕성여중고 본관 서북쪽, 조선시대 제 19대 숙종이 인현왕후( )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 있던 곳이다. 안동별궁( ) 터 : 안국동 172번지이며, 조선시대 초부터 왕실의 거처였 다가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 )처로 사용되던 궁이 있던 곳이다. 윤보선( ) 가 : 안국동 8-1번지이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7호이다. 장원서( ) 터 : 화동 23번지이며, 조선시대 궁중의 원유와 화과( )에 관 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 있던 곳이다. 복정( ) 터 : 화동 35번지에는 조선조 정도 이래 궁중에서 사용하던 복정(복지 물, 복주우물)이라는 우물터가 있었다. 화기도감( ) 터 : 화동 1번지 일대에 있던 병조에 예속된 임시관청이었던 화기도감이 있던 곳이다. 1614년(광해군 6년) 임진홰란 때 왜병의 조총에 대항하 는 화기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조총청( )을 개편한 것으로, 청나라가 강성해 지자 이에 대배하여 총포를 제작하기 위해 설치했다. 성삼문( ) 집터 : 화동 1번지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정신여학교 : 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이며, 고종 24년(1887) 미국 북장로교 선교 사 A.J.엘레스가 설립한 근대적 사립여학교이다. 독립운동가였던 김마리아(1884-1944)가 교사로 근무했던 곳이다. 김옥균( ) 집터 : 화동 1번지(정독도서관 운동장 우측 건너편), 갑신정변( )을 조도했던 김옥균이 살던 곳이다. 윤곤강( ) 집터 : 화동 138-2번지이며, 시인 윤곤강(1911-1949)이 살던 곳 이다. 시집으로 <대지( )>(1937), <만가( )>(1938), <동물시집>(1939),<빙화( )>(1940), <피리>(1948), <살어리>(1948) 등이 있다. 사간동, 소격동, 삼청동 소격서.좇인부.규장각.사간원 : 국군기무사사령부가 있는 자리이다. 1913년 에 일본군의 수도육군병원이 들어섰고, 1928년 5월부터 해방전까지 경서의학전문 학교 부속의원으로 있다가 행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2부속 병원으로 이용 되기도 하였다. 고종의 후궁 집터 : 사간동 106번짖 사간원( ) 터 : 사간동 65번지이며, 조선시대 국왕에 대한 간쟁( )과 논 박( )을 담당한 관청이다. 규장각( ) 터 : 소격동 165번지이며, 정조( )가 즉위한 1776년 궐내( ) 에 설치,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의 서화( ).고명( ).유교( ).선 보( : ).보감( ) 등을 보관.관리하던 곳이다. 소격서( ) 터 : 조선시대에 도교( )의 보존과 도교 의식( )을 주관했 던 곳이다. 번사창( ) 터 : 현 금융연수원 서북쪽에 위치, 198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 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조선 초기에 설치한 군기시( )의 창고인 별창( )이 있었던 곳이다. 화약고 터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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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6 | 라. 북촌 한옥마을의 형성 1912년 지적도의 필지 형태 및 지목을 보면 안국동, 재동, 화동, 원서동, 팔판동 등 궁궐에 가까운 지역과 율곡로에 면한 남쪽 지역은 중소규모의 필지들이 불규칙한 가로망을 이루며 밀집되어있다. 그러나 가회동길과 계동길은 물길과 길을 따라서 좌우는 필지가 잘게 분화되어 있으나, 길에서 먼 안쪽 즉 능선 부분은 대형필지로 되어있다. 아직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채로 남겨져있던, 산에서 가까운 북 쪽 지역을 제외하고, 1912년 지적도에 대지로 분류되어있던 이 필지들까지가 한 옥주거지가 형성되어있던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대가 낮은 편인 아래쪽 지 역과 길에 면한 중소규모 필지에는 중하급 관리나 중인계급들의 한옥이, 지대가 높 은 편인 위쪽과 길 안쪽에 위치한 대형필지에는 세력가들의 한옥이 자리잡고 있 었으리라 추정된다. 1921년 경성지도를 보면 그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정독도서관 동쪽으 로는 가회동 93번지의 한상룡저(백인제가)와
그 북쪽으로 가회동 31번지의 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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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필지형태 비교(1912/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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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7 | 식저(현재 가회동 31번지의 한옥밀집지역)가 표기되어있다. 가회동길 서쪽의 가회 동 16,17번지는 이재완저, 동쪽의 가회동 26번지는 한창수저(현재 가회동 11번지 일대의 한옥밀집지역)로 되어있다. 이 내용은 1917년 경성부 토지명세서의 소유주 명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대형필지와 그 이전까지는 대지로 분 류되지 않았던 임야지목의 대지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오천여평에 이르는 가 회동 31번지는 50-80평 내외의 필지로 분할되었고(1930년대), 이천칠백여평의 가회동 26번지(1935년경 건설) 역시 50평 내외의 중소형 필지들로 분할되었다. 1912년 지적도에 임야로 표기되어 있거나 1921년 경성지도에 구릉지로 표현되어 있던 현재의 삼청동 35번지 일대와 가회동 1번지(1931년 건설), 계동 2번지 일대는 대지로 전환되어 중소규모의 필지들로 정리되었다. 이 필지 위에 정세권(건양 사, 1919-1942)이나 김종량(경성목재점, 1932-1937)등의 주택경영회사에 의하여집단적으로 한옥주거지가 건설되었다. 개량한옥 또는 집장사집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한옥들은 그 이전의 한옥과는 다 음과 같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는, 유리와 함석, 타일 등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 고 평면이 단순화되고 표준화되었다. 둘째, 우선 대규모로 건설된 후 분양되는 방 식으로 공급되었다. 셋째, 주거지와 한옥이 동시에 건설되면서, 전통적인 한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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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지형도 (북촌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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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8 | 근대적인 도시조직과 만나면서 진화된 도시주택유형이다. 무엇보다도 세 번째 특 성에 주목하여 도시한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도시한옥 주거지는 해방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건설된다. 1962년의 북촌 항공사진은 조선시대부터 한옥주거지의 연장선상에서, 안쪽의
대형 필지를 포함하여 구릉지였던 지역까지 한옥들로 채워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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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중앙고등학교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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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북촌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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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9 1962년 항공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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