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가꾸기 기본계획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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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북촌 살펴보기 경복궁과 창덕궁 양궐 사이에 놓여있는 북촌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최상급의 도심 주거지였다. 이런 이유로 북촌에는 아직도 많은 문화재와 역사적 장소들이 곳곳에 남아있고, 900채 이상의 한옥이 보존되어 있는 북촌은 서울시 유일의 한옥마을이기도 하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집단적으로 조성된 북촌의 한옥들은 1980년대초 한옥보존을 위한 규제강화 시기와 1990년대 이후규제완화 시기를 거치면서 수량이 급속히 줄었고, 한옥이 헐린자리에 들어선 세대주택들로 인해 북촌의 경관 또한 크게 훼손되어 왔다. 이 장에서는 북촌의
역사와 지명유래, 한옥마을의 형성과정을비롯해 1980년대 이후 한옥의
멸실과 개발의 확산과정, 그리고북촌을 지키려
했던 많은 계획과 사업들과
현재의 북촌 현황 등역사 속에서 변화해
온 북촌의 모습을 두루 살펴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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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사진: 북촌(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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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속의 북촌 가. 양궐 사이에 놓여 있는 북촌 서울의 도시구조와 북촌 서울의 옛 지도를 보면 북쪽에 북악산( ), 남쪽에 목멱산( ),동쪽에 낙타산( ), 서쪽에 인왕산( )이 서울을 에워싸고 있고, 그 능선을 따라 성 곽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길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엋계천으로 모여, 성곽의 동쪽으로 흘러간다. 옛 서울 한양은 이러한 서울의 미세지형을 존중하면서 계획된 도시이다. 먼저 북 악산에 기대어 경복궁이 자리잡고 그 좌측에는 종묘를, 우측에는 사직을 재치하였다. 그리고 북악산과 나란히 있는 응봉에 기대어 창덕궁을 배치하였다. 한편 도성의 남서쪽에 위치한 남대문에서 비스듬하게 휘어지면서 올라온 남대문로와, 청계천과 나란히 동서방향으로 계획된 종로(운종로)가 함께 조도로체계를 이루고있다. 그리고 종로에서 각각 경복궁, 창덕궁을 잇는 길이 함계 상징적인 가로체계를 이루고 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 북악과 응봉을 잇는 산줄기의 남사면에 위치하고있다. 이처럼 옛 한양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북촌은 예로부터 서울의 가장 중요한 주거지로 인식되어 왔다. 북촌의 물길과 동네 경복궁과 창덕궁의 사이 북촌지역의 1912년 지적도를 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몇 가닥의 물길이 있다. 이 남북방향의 물길을 중심으로 동네가 좁고 길게형성되어 있다. 경복궁 동쪽 담장을 따라 흐르고 있는 제법 큰 물길 좌우로 삼청도, 사간동, 소격 동이 있고, 다시 그 동쪽에 작은 두 물길 주변으로 화동과 안국동, 송현도이 있다 그리고 가회동 물길과 계동 물길, 원서동 물길이 나란히 흐르고 있다.그 중 삼청동에서 내려온 물길 중학천은 제법 큰 하천이었고, 가회동에서 운현궁앞으로 흐르는 물길 역시 제법 풍부한 하천이었다. 원서동 신선원전에서 시 작해서 창덕궁
담장을 따라 흐르다가 창덕궁
내부를 지나 와룡동으로
흘러가는 물 길 역시 중요한
하천 중 하나이다.잿골, 맹현골, 재생원골, 원골 등과 같은
옛 지명에서 보듯, 각 동네는 물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있다. 상대적으로 동네와
동네 사이는 높은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능선들이 각각 행정구역
경계의 기준이 되었다. 이 능선에 의하여
한정된각 동네들의 영역성은
북촌 마을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점점 도시밀도가
높아지면서 물길이 메워지고
능선 부분까지 주거지가
확장되면서 그 구분이 흐릿해졌지만, 남북방향의 영역성은
여전히 동네 이름으로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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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가들의 주거지 북촌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좋은 곳이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라고 한다.북촌은 북측이 높고 남측이 낮은 지역이기 때문에, 볕이 잘 들고 배수가잘 될 뿐아니라, 남쪽으로 남산을 비롯한 좋은 경관을 가질 수 있는 지역이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자리매김 해왔다. 아울러 궁궐이 가까운 탓에 재동 일대는 팔도 각지에서 올라온양반들의 주택들과 육조관아에 근무하던 관리들과 이들에 딸린 하인들이 살던 작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종 원년(1864)에서 고종 24(1887)의 일을 두루 적은 황현 ()의 (매천야록( ))1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 )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춘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이 섞여서 살았다고 밝히고 있다.노론이 세력을 잡게되고 순조.헌종.철종을 거쳐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150년간에 걸쳐 집권하였는데, 북촌은 이들 세력의 주 거주지역이었다고 한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1917년의 지적명세서나 1921년 경성지도를
보아도 북촌지역의 대형필지는
여전히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절의 세력가들의 소유로
되어있다. 가회동 1번지는
박영효와 여흥민씨 민여휘
등의 공동소유로 되어있고, 가회동 31번지, 계동 105번지 등 가회동
일대 역시 여흥민씨 민대식(민영휘의 아들)의소유로 되어있다. 한편 가회동 26번지 등은 당시
한성은행 대주주였던 재력가
한수의 소유로
되어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북촌은 서울에서
가장 고급 주거지였으며
자부심이 강한 한옥마을로서의
모습을 유지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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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18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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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북촌의 지명유래 라.태조는 1396년 한양의 행정구역을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등 5부로 나누고, 5부를 다시 52방으로 분할하였다. 북촌지역은 북부에 포함되며, 가회방( ). 안국방( ).진정방( ).관광방( ).광화방( ).양덕방( )으로 구성되어있다.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어 왔던 이 지명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다가, 현재는 열 개 법정동과 두 개 행정동으로 정리되었다. 지명은 동네의 역사와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현재의 지명에 이르기까지 각 동네의 지명유래를 ‘동명연혁고( )’등의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회동 : 조선 초에는 한성부 북부 가회방 지역이었다. 1914년에 맹현( ).재동( ).동국( ).계동( )일부를 합쳐 경성부 가회동이라고 하였고, 1936년 가회정( )으로 바꾸었다. 1946년에는 다시 가회동으로 바뀌었다. 계동 : 제생원( )은 <동국여지비고( )> 권1혀과공서조( )에 북부 양덕방( )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종로구 계동이다. 계동( )이란 동명은 이 곳에 제생원( )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초기에는 제생동, 계생동( )으로 불리다가 약칭된 것이다. 재동 :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안국동 사이에 있는 재동은 본개 잿골 또는 회( )동으로 불리었던 곳으로, 불타고 남은 ‘재’에서 제( )를 빌어 쓴 이름이다. 종로구의 잿골(재동+)은 조선 세조 때 이 곳에서 살상극이 벌어져 그 피내음을 없앤다고 재를 뿌려 나온 이름이라 전해지고 있다. 사간동 : 사간동은 경복궁 건춘문( )의 길 건너편에 사간원( )이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이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안국동 : 조선조 성리학자이며 정치가인 김안국( ,1478-1543)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삼청동 : 도교( )의 태청( ).하청( ).옥청( ) 3위( )를 모신 삼청전( )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산과 물이 맑고 인심 또한 맑고 좋다고 하여 삼청( )으로 부리웠다고도 한다. 송현동 : 송현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송현은 솔고개 또는 솔재라고도 부르는데 지금의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 직원숙소 사이에 있던 고개로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송현이라 불렀다. 소격동 : 삼청전( )의 삼청성진( )의 제사를 지내는 소격서( )가 있었다하여 유래되었다. 화동 : 조선시대 화유, 화과의 일을 담당하던 장원서( )가 지금의 화동 23번지에 자리하여 많은 꽃을 기르고 있었다 해서 글자 그대로 화개동(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줄여서 화동으로 불렀다. 또 다른 유래로는 화기동이었던 것이 변하여 화개동으로 되었다고도 하는데, 당시 총포를 만들었던 화기도감( )이 있었기 때문에 화기동이었다가 음이 비슷한 화개동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원서동 : 원래 원골( )이라고 불리었으나 창경원( ) 서쪽에 있다고 하여 원서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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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북촌의 옛 장소 북촌은 고려시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였다. 이곳 북촌에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다양한 장소들이 있다. 사료 등을 통해 알려진 장소들의 유래와 역사, 인물을 동네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서동 북영( )터 : 창덕궁 흥북문( ) 밖의 원서동 1번지는 훈련도감의 북영( )이었다. 이후 무관학교와 유년학교 자리로 쓰여졌다. 사도시( )터 : 원서동 206번지 자리이며, 태조 원년(1392)에 궁중의 미고과 장( )의 공급을 맡은 곳으로서 요물고( )라고 불리었다가 그후 공정고, 사도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1910년에 창덕궁경찰서가 설치되었다. 백흥범( )가 : 원서동 9-5번지이며, 한국 소주택의 전형적인 요소를 비교적 잘 지니고 있는 주택으로 서울시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진우( )집터 : 원서동 74번지이며, 고종 27년(1890ㄴ)에 태어나 1945년까지 활동했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3.1운동때는 48인의 한 사람이었다. 노수현( )집터 : 원서동 75번지이며, 근대 미술계의 중진으로 활약한 화가이며, 1944년에 화실을 마련하고 1956년 6월까지 거주하였다. 박인환( )집터 : 원서동 134-8번지이며, 모더니즘 시인으로 찬사를 받았던 박인환(1926-1956)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임규( ) 집터 : 원서동 54번지이며, 철종 14년(1863)에 태어났으며,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당시 48인의 한사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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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 제생원( ) 터 : 계동 142-2번지(현대빌딩 앞 화단)이며, 태조 6년(1397) 조준( )의 건의에 의해 지방의 향약재( )를 수납하여 혜민국( ) 동서활인서( )와 같이 궁민( )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설치된 곳이었다. 경우궁( ) 터 : 계동 146번지이며,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이 고정을 이곳으로 모신 뒤 혁신내각을 조직하였던 곳이다. 석정( )골 보름우물터 : 계동 25-1이며, 우물이 돌로 되어 있어 동네 이름이 석정골이라고 부리워졌으며, 이 우물물이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 부려졌다고 한다. 외국인 최초의 선교사였던 중국인 주문모( ) 신부가 1794년 12월 17일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들어와 이 동네 신도(역관 최인길 마티아)집과 여신도 회장이었던 순교자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숨어 성사지행을 하며 선교활동을 벌일 당시 이 우물에서 길어낸 물로 영세를 주고 마시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한국천주교회사) 유심사( ) 터, 3.1독립운동 기념터 : 계동 58번지(석정골보름우물터 앞) 언저리에 있었던 유심출판사는 한용운( )선생이 3.1독립정신을 중앙학교생들에게 심어 주었던 곳이다. 중앙고등학교 : 계동 1번지이며, 삼일운동책원지( )였다. 중앙고 본관은 사적 제281호(1937년 9월에 준공한 석조건축물, 박동진( ) 설계), 서관은 사적 제282호, 동관은 사적 제2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준경( )(1499-1572) 집터 : 계동 128번지이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 살던 곳이었다. 영의정 답지않게 검소하게 사는 그의 집을 멀리서 보면 창고처럼 보이므로 동고( )라는 호( ) 대신 동고( )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일대를 이동고터라고도 하였다. 여운형( ) 집터 : 계동 140-57번지이며 독립운동가. 정치가였던 여운형이 살던 곳이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이었으며, 해바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그 후 근로인민당 당수로 정치활동을 하다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로타리 우체국앞에서 권총을 맞고 절명하였다. 배렴( )집터 : 계동 72번지이며, 한국동양화단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었다. <추( )>, <요원( )>, <산전( )>등의 작품이 있다. 승문원( ) 터 : 승문원은 외교관계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숙종의 왕자인 연령군( )과 그의 아들 낙천군( )이 살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 )이 살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시 잠시 고종이 피신하기도 하였으므로 계동궁( )이라 부른다. 홍문관( ) 터 : 궁중의 경서( )와 사적( )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기구로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 ). 사적( )의 관리, 문한( )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관상감 관천대 : 사적 제296호로 계동 140번지이며, 숙종 때 남구만이 창경궁에 세운 관천대(보물 제851)와 구별하여 관상감 관천대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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