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oks - My Point of View 23

Shin Young-Hoon /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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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8-23 Hanok Master Architect Shin Young Hoon visited David Kilburn's hanok in Kahoi-dong, Seoul, to explain his views about the value of hanoks. As well as in Korea, Mr. Shin has also designed and built hanoks in Washington, Mexico, Paris, and in London for the British Museum.

Part 1

Part 2

Part 3

Part 4 Part 5 Part 6
Part 7 Part 8 Part 9


신영훈
한옥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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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집’이라고 하거든요. 이 ‘집’이라는 말이 우리가 태어난 이 곳이 ‘집’ 아니에요?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 한국말로 어머니 ‘어’자를 계집이라고 해요. 그것은 ‘자기집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거든. 거기서 우리가 태어나니까. 그러니까 ‘집’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구조물이라는 개념보다도 살림살이하는 문화의 기반을 조성해야 된다하는 흐름을 지닌 것을 ‘집’이라고 우리는 이해하고 살아왔어요. 또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한테 그렇게 배웠죠. 그래서 ‘한옥’이라고 하는 것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서면 나무로 깐 마루가 있고 마루로 올라서서 한쪽으로 들어가면 큰 방이 있어서 그게 부모님이 계신 안방이고 마루 건너편에 있는 작은 방은 아이들이 자는 작은방, 건넌방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그렇게 구분을 해야 되는 것이 어른들은 어른들의 생활이 있으니까 어른이 사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안방이 규모가 커야되는 건 무슨 가족이 모인다든지 잔치를 한다든지 할 때는 그 큰방에 식구들이 다 모여야 하니까 안방을 크게 만드시고, 반대로 건넌방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적은 숫자만 가지고 공간을 활용해야 하니까 그렇게 넓지 않게 만들어주거든요? 그런데 그 건넌방의 애들도 큰 아이가 사는 건넌방 또 그 옆에는 작은아이가 사는 건넌방 이런 게 있어가지고 한 쪽 방 옆으로 쪽문을 만들어가지고,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것이 한옥이에요. 그러니까 한옥이라고 하는 것은 한꺼번에 한 가족이 한 공간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위계질서에 따라서 다 서로 개성을 충분이 살릴 수 있도록 살림살이를 하는 그런 공간으로 만든 것이 한옥이죠.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보면 그런 공간들이 그렇게 흔하지 않거든요. 내가 일본에 나라문화재연구소에 가서 일본건축공부를 좀 하면서 몇 년 머물렀었는데, 그 쪽에 가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는가 가서 보니까 같은 살림살이를 하는데 우리하고 방식이 다르더라고요. 또 중국도, 중국에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드나들면서 북경대학에 가서 이야기도 들어보고 공부도 한 적이 있었는데, 중국집도 구조가 우리하고 다르더라고요. 그것을 보면 ‘동양 건축이라고 해서 아 이런 유형이더라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개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것을 염두해두고 보니까요. ‘한옥이라는 것이 그런 개성을 참 잘 간직해 기특한 집이더라’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옥이 다른 건축물과 조금 다른 것은 난방시설을 하기 위해서 구들이라는 것을 만들거든요. 이 구들은 밑에서 불을 떼면 방이 겨울에 뜨듯하게 난방이 되죠. 그런데 방하고 방 사이에는 나무로 마루라는 것을 깔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은 마루에서 뛰어놀지 방에서는 뛰어놀지를 않죠. 방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뛰어놀면 가라앉지만 마루는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무리 뛰어놀아도 아무 탈이 없죠. 그런데다가 넓게 만들었기 때문에 집에서 잔치를 한다던지, 제사를 지낸다던지 수백명이 모였더라도 마루에 대청에서 다 할 수 있을 만큼 넓이라서 그래서 3칸 대청이다 5칸 대청이다 하는 넓이를 유지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서울이 도시가 되면서 한옥을 짓고는 그렇게 넓은 마루를 설정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마루 한 칸 정도를 하는 게 고작이었죠. 그러니까 우리가 서울 시내에서 볼 수 있는 한옥하고, 옛날 어른들이 살던 한옥하고는 유형이 달랐어요. 그러니까 그걸 염두해두고 한국에 오셨을 때 우리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시골에 있는 집들도 한옥으로 살펴보실 필요도 있지만, 지금 왕궁에 가면 ‘연정당’ 같은 데 들어가시면 옛날 살림집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집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보시면 규모가 아주 듬직하고 넓직하거든요. 그거는 그만큼 생활에 편의한 것을 도모하도록 배려가 되어있기 때문인데, 그런 규모가 완성이 된 것은 삼국시대부터 같아요. 우리가 가령 옛날 건물터를 발굴해 보면 기둥 간격 터가 꽤 넓어서 오히려 지금 시골에 있는 한옥보다도 규모가 컸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걸 보면 삼국시대 이 후부터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 까지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던 살림집들이 그만큼 사는 사람들이 넉넉하게 살 수 있는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마련 되어있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죠. 그런데 그 공간에 크게 두가지로 나눠가지고요. 신발 벗고 올라갈 때 나무를 가지고 마루를 깐 대청이 있고, 그 대청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돌하고 흙을 발라서 불을 뜨끈하게 뗄 수 있는 구들방이 만들어지거든요. 그것을 보통 온돌방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방하고 마루가 한꺼번에 구조된 것이 한옥의 특성입니다. 그건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에 가선 그런 구조물을 볼 수가 없어요. 이제 그런 걸 보면 어떻게 여기는 그렇게 구들이라는 것과 마루가 있을까 하는데, 여기는 사계절이 뚜렷하죠. 그래서 겨울이 꽤 춥습니다. 그러니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게 구들을 만들었고 그 대신 여름은 꽤 덥죠? 그 더운 여름을 좀 시원하게 살라고 해서 마루를 깔았어요. 마루를 좀 넓직하게 깔고 보니까. 무슨 행사를 한다던지 손님이 많이 모인다던지 하면 좁은 방에 들어가는 것 보단 마루 깐

대청에 모여앉아서 잔치도 하고 또 일어나서 뚱딱뚱딱 춤도 추고 그러셨거든요? 그럴 때 춤을 추고 즐겨노실 때 방안으로는 절대 안 들어가시고 대청에서 다 해결하시죠. 그만큼 대청이 넓어서 3칸대청이다, 5찬대청이다 하는 말이 방의 몇 배가 되는 넓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넓은 집 대청에 올라가려면 백여명이 넓게 올라가 앉을 정도로 여유로워요. 그러니까 무슨 모임을 한다하면 다 대청에서 했죠. 혼인식도 다 대청에서 했고, 회갑연이라던지 잔치도 다 대청에서 했거든요. 이제 그런 걸 보면 구들 들인 방하고 마루 깐 대청이 쓰임에 따라서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 할 수 있는 그런 구조물을 구성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니지 않았으면 그건 어려웠을건데요. 그런데 우리가 온돌 불 떼고 자는 것을 구들이라고 하듯이 마루 깐 곳을 대청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일본집이나 중국집에도 이런 구조가 없거든요? 지금도 없을 뿐 아니라 예전에도 없어요. 그러니까 중국이나 일본기록에도 그런 것이 전혀 없거든요. 그런 걸 보면 우리의 구들이란 개념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을까 궁금해지는데, 옛날 선사시대 유적지를 발굴해보니까 옛날 작은 움집에도 구들 들인 방이 있는 흔적이 있는 데가 있어요. 그런데 그 방 들인 데서 구들을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게 도대체 어디까지 파급이 됐을까 하고 조사를 해보니까 지금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가서 보면요. 우리 고구려 사람들이 살던 덴 다 그런 자취가 다 남아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마루 깐 대청과 구들 들인 방이 구조물로 등장을 해서 우리 살림집으로 활용이 됐었다는 자취를 볼 수 가 있죠.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전국에 있는 집터를 발굴해 봤더니 우리 신라 때에도 마루 깐 대청 자리가 있고 구들 들인 방 자리도 있어요. 그러니까 삼국시대에 이미 구들과 방 개념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고구려 옛날 땅, 지금의 만주땅에 가서 보면 그런 구조가 없어요. 거기는 기후가 안 맞았다는 뜻이겠죠. 두만강이나 압록강 밑 쪽으로 내려오면 그게 있는데, 지금 만주땅 북쪽으로 가면 보기가 드물다는 말이에요. 그걸 보면 기후에 맞춰서 구들을 만들었을 테니까 마루 깐 대청도 그렇고 구들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 지혜에 따라서 그런 구조물들이 적절히 잘 구성이 된 거구나. 그렇게 확인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프랑스에 가서 한옥을 하나 지으면서 구들을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구들에 불을 떼 줬더니, 프랑스 사람들이 구들에 들어가보더니 ‘아 이렇게 엉덩이가 따뜻해 본 적 처음인데, 배가 소화가 잘 되니 참 좋으네’ 그러시더라구요. 그걸 보면 인체가 왜 하체가 든든해야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엉덩이가 그렇게 따뜻하면 배가 소화가 잘 되서 소화제를 안 먹어도 되요. 또 특별히 뛰어다니며 운동을 하지 않아도 소화가 그렇게 잘 된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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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 어른들이 밥 먹고 앉으셔가지고 하루종일 공부를 하시고 했는데도 그만큼 오래오래 사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구들의 덕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구들이라는 것이 인체에도 손해를 주는 시설은 아니다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죠. 그래서 우리가 나가서 구들들인 집을 몇 채 지어봤더니 외국에서도 굉장히 관심을 보이면서 아 그런 방법이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못 쓰게 된 나무들 소각시킬 것들 일부러 소각장에 가져다 태울 것이 아니라 아궁이에 갖다 집어넣고 방을 따뜻하게 하면 되겠구나 아 저런 것들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아꼈다가 불 때자 하는 지혜가 발휘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 것을 들어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지혜롭게 생활하는 것이 유리하는가를 탐구하는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삶의 원친이라고 할 경우에 한옥은 그런 감각을 꽤 가진 집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도 도시가 생기면서 구들 들인 집이 점점 적어지고 아파트가 유행이 되기 시작하니까요. 아파트에 구들을 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토피가 걸렸느니, 무슨 병에 걸렸느니, 손해를 많이 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렇지만 도시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도리없이 아파트 생활을 해야하니까 한옥을 짓고 나와서 살기 힘들죠. 그러니까 도리어 한옥을 헐고 아파트를 짓던 시대가 있었는데, 요새는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 생긴 사람들은 오히려 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데다가 당신들이 살 한옥을 짓고 있어요. 그것은 그만큼 천연스러운 기운을 받고 사는 게 제일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들 들인 방, 마루 깐 대청 이게 있는 한옥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하고 탐구하는 공부를 좀 착실하게 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걸 공부하는 분이 계시겠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이 그런 것을 잘 정리해서 세계의 여러분들에게 잘 전달해서 인류가 가지고 있는 지혜로은 것들을 자기 집에 잘 재현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내 것을 남한테 자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불 땐 구들이 인체에 이롭다는 증거를 가지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하면 어떤가 싶어서 했는데,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외국에 가서 한옥을 몇 채 지었어요. 미국에도, 멕시코에도, 프랑스에도, 덴마크에도 이렇게 몇 군데 지었는데, 거기 집들을 가서 경험한 양반들이 그 뜨뜻한 구들에선 하룻밤 자고 나서는 겨울철에 자주 좀 와서 앉았다 가겠다 그런데요.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엉덩이가 뜨뜻해서 배가 훈훈하니까 소화가 잘 되고, 위장이 그렇게 든든해지고 좋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양에서 중국집이나 일본집은 구들 들인 집이 없었죠. 그래도 중세기부터 구들 들인 집이 간혹 있었어요. 거기 기록된 사람들의 기록을 보니까. 구들 들인 집이 정말 뜨뜻하고 좋구나 하는 기록이 있어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어떻게 발휘하면 좋을까 그런 성과, 효과를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조성된 여러가지 구조물에서 생활 공간에서 터득을 하고 거기서 장점을 발휘해서 21세기에 내 집을 지을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발휘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꼭 우리가 남의 집을 본 떠서 자기 생활을 살고 싶던 시절이 있었죠. 선진국을 따라가던 후진국 시절이 있었죠. 그러나 그 지역에 따라서 풍습에 따라서 생활공간의 특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보면 우리가 서양 건축이라고 해서 서양집이 똑 같은 집이 하나도 없잖아요? 북극에 가면 북극대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에 가서 보는 집하고 남미에 가서 보는 집하고 집의 모양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또 유럽도 이태리 쪽하고 남쪽하고 다르죠. 이제 그런 걸 보면 집이라는 게 생활 공간이니까. 기후에 맞춰서 어떻게 적절히 살 수 있는 공간이 될까 생각하는 것이 인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것에 맞는 집들을 지어오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지혜는 구들을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기후에 맞는 집을 지으려고 애를 썼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옥에 살 때는 한복만큼 생활이 편한 옷이 없어요. 양복을 입고 구들에 앉으면 꽉 조여줘서 무릎이 아파요. 그런데 한복은 넉넉하니까 아무리 앉아도 무릎이 아픈 법이 없어요. 그걸로 보면 의식주가 한 흐름 속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것에 따라서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생긴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옥을 살펴보면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이렇게 까지 발휘된 거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활하면서 여러가지 요건이 있는데 집이라는 하는 게 사람이 드나드는 마당보다 방이 조금 높지 않습니까? 마당에 온 분을 방에 앉은 채로 바라봤을 때 집이 너무 높으면, 마당에 서 있는 사람 키보다 높은 데서 바라봐야 되지않겠어요? 그런데 한옥은 그렇게 높지 않게 만들어가지고 마당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이나 방에서 보는 사람이나 눈높이가 맞게 하려고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사회가 조직이 되고 위계질서가 생기면서 높은 사람들은 밑에다가 댓돌이라는 것을 대가지고 생활공간을 좀 높도록 만들어 놓죠. 그러니까 찾아온 사람이 집주인에게 인사를 드리려면, 한참 쳐다보고 절을 해야되죠. 그만큼 격이 높아지도록 구성을 했었단 말이죠. 이제 그런 것을 보면 우리 한옥에도 많은 문화의 흐름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저렇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유리창을 끼는 게 아니라 나무로 살대를 만들고 거기 위에 한지를 바르거든요. 한지를 발라 놓으면 바람이 통풍이 되서 문을 열지 않아도 방안에서 항상 청정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방에도 문을 열지 않아도 창호지에서 통풍이 되니까 그러니까 감기라던지 외부 공기를 갑자기 쐬면 손해를 보는 병도 한옥에선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한지를 통해서 통과하는 신선한 공기가 작동을 하도록 그렇게 배려를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지를 하나만 발라선 추울 수 있으니까. 난방하는 시절이 되면, 그걸 문을 몇 겹을 닫게 해서 구들의 뜨뜻한 것을 유지, 관리 할 수 있도록 문을 조절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필요에 따라서 자기 생활이 기후에 어떻게 적절히 맞느냐를 통해서 지혜를 발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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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을 다녀보면 우리처럼 여러겹으로 된 문이나 창이 흔하지 않더라구요. 그런 걸 보면 창호지라고 하는 한지가 다른 나라에선 그렇게 제작, 공급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한국에는 한지를 만들 수 있는 목재가 쉽게 생산 되었기 때문에 다량으로 종이를 만들어서 공급을 하니까 그것을 두겹, 세겹으로 만들어서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하고, 또 기름을 칠해서 방바닥에 바르면 장판이 되어서 사람이 아무리 걸레질을 해도 장판이 벗겨지지 않도록 배려를 했죠. 그만큼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을 건축에 충분히 활용했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습니다. 또 나무 목재를 가지고 골격을 하고 중간에는 흙으로 토벽을 만드는데, 흙이 말라있기 때문에 오히려 실내에 있는

습기를 흡수해서 바깥으로 배출해주는 구실을 같이 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어떻게 구조했을 때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 사계절을 편안하게 지내나 궁리를 하면서 지은 것이니까. 우리가 한옥을 조사해 보면 문도 한 겹만 해서 닫은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문이 여러겹으로 되어있어서 엄청난 추위에도 뜨뜻하게 살 수 있게 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집 속에 담긴 지혜가 상당히 탐구를 넉넉히 한 사람들의 결과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도 한국이 남쪽하고 북쪽 기후가 달라서 그런지 북쪽의 창하고, 중간지방의 창하고, 남쪽의 창하고 다 달라요. 창만 다른게 아니라 집 구조부터 달라요. 또 겨울에 춥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방에다 난방을 했죠. 구들들인 방을 큼직하게 한 곳이 안방이라고 했는데, 안방은 부모님뿐 아니라 크는 아이들도 같이 지내죠. 또 건넌방이라고 있는데, 아이들이 크던지 새로 결혼한 사람들이 사는 방으로 독립시켜서 살게 만들어줬고 그 방도 난방을 다 할 수 있게 만들었고, 방마다 작은 마루를 놔서 가구를 놓고 쓸 수 있게 만들었죠. 옛날 양반들이 마루와 구들을 참 적절히 잘 규격을 맞춰서 했구나. 마루는 시원한 것을 위주로 했고 방은 따뜻한 것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방에 들어가면 천장이 낮은 데 비해서 마루에 올라가면 천장이 높아서 서까래가 올려다 보일 정도로 높죠. 그리고 서까래도 단순히 걸지 않고 가운데로 이렇게 올려서 바람이 이렇게 유통이 되도록 그렇게 까지 궁리를 하면서 집을 지었어요. 그리고 뒤는 벽을 막아서 추운 겨울에 북쪽에서 내려올 수 있는 찬 공기를 막아주는게 북쪽 벽이고요. 그러면서도 문을 달아서 필요에 따라서 여닫게 할 수 있고 남쪽의 마루는 문만 달고 벽을 치지 않아서 모든지 생활에 필요한 공간을 활짝 열고 수급할 수 있도록 만든게 대청이죠. 그래서 모임이나, 혼인식이나, 제사라든지 많은 사람들이 모일 때는 모두 대청에 모여 앉을 수 있도록 그렇게 생활 공간이 구성 됐었습니다. 그것에 비해서 방은 안방, 건넌방, 뜰아래방, 이렇게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만들어줬기 때문에 신혼부부가 사는 방은 뜰아래를 따로 만들어서 시부모가 사시는 데 구애받지 않고 단락하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것이 한옥입니다. 그러니까 한옥은 다른 나라에서 배치하는 것과는 또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특성을 오늘날에도 좀 활용을 하면 사는 사람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렇게 생활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졌다는 말을 들을만 합니다. 그러니까 한옥은 냉,난방 시설이 되어있다는 말을 하는데. 불 떼는 아궁이가 있는 구들 들인 방은 안방으로 해서 장작을 떼니까 뜨뜻하게 살고 대청은 마루만 있으니까 난방을 떼는게 아니고 여름철에 외부에서 오는 바람을 시원하게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대청에 있는 천장을 보면, 이렇게 수평으로 만들지 않고 이렇게 만들어서 공기가 소통이 되도록 환풍이 되도록 공기라는 게 돌잖아요? 그것까지를 고려해서, 그러니까 서까래도 수평으로 걸지 않았습니다. 처마에서 걸기 때문에 비도 쉽게 내려가지만 그 뿐만 아니라. 찬 공기가 들어오더라도 나무 밑이 시원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천장이 되도록 만들었죠. 그래서 방은 수평으로 만들고 마루는 경사진 상태로 천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공기 통풍을 아주 잘 되도록 시도를 했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구조를 외국에서 해봤더니 기후에 따라서 안 맞는 고장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아무리 한옥이 가진 특성이라고 할 지라도 그 지역에 가서 같은 걸 똑같이 했더니 안 맞앙요. 그러니까 그 지역 사람들은 그 기후에 걸맞는 자기 집을 지어서 산 거지 구조물을 할 줄 몰라서 안 한게 아니다는 것을 거기다 한옥을 지어 보니까 알 수 있었죠. 그러니까 남의 나라 집이 어떻다 우리 나라 집이 어떻다. 하는 것은 책상 위에서 공부만 해가지곤 안되겠더라구요. 세계각국을 다니면서 각 나라의 집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잘 살핀 다음에 자기 집을 지을 때 그 특성에 걸맞는 살림살이 터에 걸맞는 그런 집을 짓는 게 좋은데, 같은 한국 땅이라도 그냥 평지 밖에 없는 곳에 집을 짓는 사람이 있고, 뒤에 동산이 있어서 동산 밑에다가 집을 짓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 때 동산아래와 평지에 짓는 집이 똑같아선 안됩니다. 지역에 맞게 집을 지어야지요. 또 식구 수에 따라서 맞게 지을 텐데 우리 한옥은 거의 똑 같은 형태, 똑 같은 규모가 흔하지 않아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같은 지역에 집을 짓고 살아도 같은 형제들이 집을 짓고 살았는데, 형네 집과 동생네 집 규모가 달라요. 그건 왜냐면 형네집은 딸들이 많고 아들이 적어서 딸들이 시집을 가버리니까 아들이 살 집을 그렇게 크게 지을 필요가 없으니까 규모를 작게 지었는데, 동생네 집은 딸보다 아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형네집보다 크게 지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외부에서 볼 때 큰 집이 형네집인 줄 알고 그 집부터 인사를 가거든요. 그것을 고려를 해서 동생들이 큰 형네 집도 크게 지어줬어 집에 격을 높여주는 격을 유지해주는 그런 작업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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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인데 말이죠. 전세계를 다녀보면 같은 집 거의 없잖아요. 그것은 제각기 사는 방도가 다르니 때문인데, 우리 한옥은요. 제가 지금 양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데 옛날 우리 한복은요. 두루마기를 입어요.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펄럭거리면서 다닐 수 없어요. 살살 잘 잡고 다녀야 하는데, 그러니까 마당을 넓게 지을 수가 없어요. 넓게 지으면 그걸 입고 다니는데 시간이 꽤 걸려요. 그래서 아주 규모가 큰 집의 경우는 집 주인 양반은 집에서만 움직이지 마당은 아랫사람들이 다니니까 마당이 넓었죠. 그러나 보통 대인들이 사는 집은 그렇게 활동하기 어려우니까 좁았죠. 그래서 한옥의 일종의 약점이 마당이 좁은 게 약점이에요. 그런데 막상 시골에 가서 넉넉히 사는 집을 가면 대문칸 들어가는데부터 길이 넓어서 한참을 걸어요. 들어가는 대문 앞에다가 물을 흐르게 해서 거기서부터 말을 내려서 걸어들어가요. 여기 창덕궁에 연경당이라고 옛날 살림집의 전형적인 것을 만들어놓은 왕궁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게 우리 고급 인사들이 사시던 집 모양을 딴 거거든요. 그 집도 가서 보면 앞에 돌다리가 있고 개울이 흐르고 있어요. 그걸 지나가야 대문이 나와요. 그런데 대문은 쑥 올라가고 옆에 대문은 낮죠. 그래서 이게 솟아 올라와 있다고 해서 ‘솟을대문’이라고 해요. 솟을대문이란 말은 우리 키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키큰 사람이 쑥 올라가 보이잖아요? 그것처럼 솟아올라와 있단 뜻이죠. 그만큼 주변에서 솟아올라와 있으니까 대문 찾기가 쉽죠. ‘아 저기구나’ 대문 찾아갈 때 누구한테 묻지 않아도 대문 찾기가 쉽죠. 일단 대문을 들어가면 들어가자 마자 앞에 벽이 가려요. 그 벽이 가리는 것을 ‘중문칸채’라고 해요. 가운데 대문은 그 바깥문이고, 그 안에 들어가는게 중문칸채가 또 있어요. 그 문을 들어가야 안마당이 있어서 안마당에 들어가야 대청이 올려다 뵈죠. 대청이 올려다 뵈야 집주인이 어떻게 살고 있구나 살림집의 중심건물을 볼 수 있어요. 그 중심 건물의 대청에서 바라다 보이는 제일 가운데에 방이 아니라 대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사람들이 소식도 없이 휙 들어오고 했을 때 여름철에 좀 벗고 있더라도 방이 옆으로 있으니까. 대청에 벗고 있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그러니까 외부사람들을 마주칠 때는 그게 노출이 되지 않죠. 그만큼 예의를 갖출 수 있도록 집의 구조를 배려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대게 들어가보시면 대청이 큰 마루가 가운데 있고, 안방은 이렇게 생기지 않고 이렇게 생겨서 대청에 앉아서는 안방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가 없어요. 마당에선 더구나 몰라요. 그만큼 개성을 존중했다는 것이죠. 그 구조가 그에비해 건넌방에는 마루 한쪽 끝에다가 할 뿐만 아니라 방 앞에다가 툇마루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손님이 와계시구나 하고 방을 들여다보면 외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개방성이 강하죠. 우리가 어디 들어갔을 때 늘 조심하면서 들어가는게 손님이 기왕에 와계실 때 함부로 떠들면서 들어가면 실례가 되니까. 계신가 안계신가 하는 것을 확인 하는 게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마루가 앞에 깔려있기 때문에 대번에 신발을 보면 ‘아 몇 분이 와 계시구나’ 하고 알 수 가 있단 말이죠. 그래가지고 대청으로 해서 신발 벗고 대청으로 올라가서 방으로 들어가셨으니까 방으로 들어가 앉아서 몇 사람이 직접 눈에 띄진 않지만 지금 손님이 와계시니까 밖에서 떠들지 말고 조심해야겠구나 그런 마음을 갖도록 준비를 하게 하셨단 말이죠. 이제 그것은 우리가 마루 깐 대청과 구들 들인 방을 어떻게 적절히 활용하는가를 염두해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구들들인 방은 주로 가족만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어요. 더구나 안방은 가족 이외의 사람들은 들어가기가 쉽지 않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대청 한쪽 끝에다가 건넌방이라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와서 점심 대접이라도 하고 할 양반은 건넌방으로 모셨지 안방으로 모시는 경우가 드물어요. 같은 형제, 사촌이 와도 그렇죠. 그런 걸 보면 안방이 생활공간으로서의, 부부생활공간으로서의 비경을 잘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거기서 아이들도 먹고 자고 크지만 큰 아들 딸들 며느리라고 하는 것들은 뜰아래 따로 방을 만들어서 했기 때문에 안방을 잘 드나들 필요 없고 건넌방에서 머물면 됐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활에 필요한 위계질서 같은 것을 아주 잘 표현하려고 애쓰셨어요. 그것을 우리가 가령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에가서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비교탐구를 해보시면, ‘아 같은 동양이라도 요런 서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실 수가 있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이웃나라를 다니면서 그 쪽 살림집들은 어떻게 되었나 공부하는 까닭이 고장에 따라서 집의 모양이 다를 뿐 아니라, 신분이 어떠냐에 따라서 집의 규모 뿐만 아니라 살림하는 방식도 다르잖아요. 그런걸 보면 한옥이 지닌 속셈이 어떠냐하는 것을 알고 한옥을 접근하면, 대부분의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습니다. 한옥은 구조물을 통해서 공부하는 방법도 있지만, 한옥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통해서 파악하는 방법도 있죠. 한옥 대청에서 잔치를 하실 떄 보면, 큰 상을 놓고 그 상에 쭉 둘러서 잔치를 즐기지 않고, 작은 상을 여러 개 놔요. 왜 작은 상을 여러 개 놓느냐 하면, 어른들 1대, 2대, 3대 했을 때, 1대하고 2대, 3대가 한 밥상에 앉게 하지 않고, 1대는 1대대로, 2대는 2대대로, 3대는 3대대로 나눠 앉게 해서 그만큼 연세가 비슷한 사람끼리 나눠 앉으니까. 어른들은 약주자시다가 담배도 피고 하시지만 아이들은 어른 앞에서 담배 피기가 미안하고 하니까. 따로 떨어뜨려놔가지고 거기서 지네끼리 즐기면서 하라고

그러니까 자기네끼리는 담배 피워도 되지만,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워서 밥 먹는데 연기를 피우려고 애쓰지 않거든요. 그만큼 우리가 생활공간을 만들면서 생활에 필요한 행동거지를 어떻게 해야 편의하게 도모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서 지은 집이 한옥이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어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쪽마루라는 것을 방 앞에 만드는데, 이 쪽마루라는 것은 가서 잠깐 걸터앉는 방법도 있고, 드나드는 방법도 있고, 거기 앉아서 뭐 여러가지 작업을 한다던지 공부를 한다던지 하는 것은 쪽마루에선 못하게 되어있죠. 그 대신 대청 같은 데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잔치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대신 방 뒤 쪽에 뒷마루가 있어요. 뒷마루에는 필요한 걸 갖다가 쌓아놓기도 하고 해서 자기가 필요한 건 늘 꺼내다 쓸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하나 생기죠. 그러니까 마루도 뭐를 어떻게 쓰는 건가에 따라서 한옥주변에는 여러종류의 마루가 구비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한옥을 보면 아 꽤 다양하게 공간을 구성하려고 애를 썼구나. 그런데, 같은 생활 공간이면서 부엌 옆에 있는 창고에는 장독 같은 것은 땅에 묻어야 되니까. 그런 것은 마루를 깔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한옥이라고 해서 전체가 다 마루가 깔려있는 곳은 드물고, 흙도 있고, 마루도 있고, 구들도 있고, 아주 다양한 변화가 있어요. 이제 그런 것을 보면 어떻게 생활에 편리한 것을 도모 하느냐 하는 궁리를 옛날부터 삼국시대부터 많이 해왔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선사시대부터 옛날 건물 터를 발굴해 보면 그 당시에 살던 생활공간이 발굴터에서 자기 유물이 나오잖아요? 그걸 보면 삼국시대에 살던 사람, 특히 말을 타고 다니던 사람이 살던 집하고 여자들이 살던 방이 있는 내부하고 완벽하게 달라요. 말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드나드는 데는 신발 벗고 뭐하고 복잡하게 꾸며놓고는 당장 말타고 가기엔 신발 신기가 어렵잖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그런 사랑채에는 신발 신고 그대로 들어가서 마루에 걸터앉았다가 방에 들어가서 잘 때에 완전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자고 그렇지 않고는 마루에 앉아서 대화하고 모임있다가 급한 일 있으면 뛰어나가서 말 타고 그렇게 구조를 했단 말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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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세계 많은 나라들을 좀 다녀봤어요. 그런데 저 남미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 북구라파까지 다니면서 전세계를 몇 바퀴 돌았고요. 동남아시아도 그렇고 중국 같은 데도 가있고 그랬는데 거기 가면서 아무래도 남들은 어떻게 사느냐 집 구경을 하고 싶어서 돌아다녔죠. 그러니까 전세계 이름난 집들을 꽤 많이 봤단 이야기가 되겠죠. 그런데, 같은 동양의 집도 한국집하고 일본집하고 중국집하고 같지 않잖아요. 같은 중국집이지만 가령 만주땅의 집하고 남쪽의 양자강 유역의 집하고 두만강 유역의 집하고 다르잖아요? 그런데 일본도요. 일본도 조그만 나라고 긴 나라인데도 그런데도 오사카 쪽의 집하고 교토의 집하고 그렇게 집이 달라요. 나라의 집하고. 그런데 그거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근거를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집이 다르다고 하는데 실제로 살펴보니까. 그런 경향이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보면은 어떤 사람이 그 지역에서 그렇게 걸맞는 집을 짓고 사느냐 어떤 지혜를 발휘했겠느냐를 조사를 다녀보면은 어떤 사람들은 참 걸맞은 집을 잘 지은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참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집을 지었네 이런 경우도 있더라고요. 민족성이라는 게 이렇게 다른 건가. 왜 다른지는 모르는데 살펴볼 도리가 없었는데, 한번은 서역에서 인도까지 불교 공부를 하기 위해서 내내 압록강 두만강에서부터 걸어서 거길 갔어요. 그런데 가다 보니까 주변에 많은 유적들이 있는데, 그 유적 중에 어떤 것은 동굴이 있고, 그 동굴 속에다 불상을 조각하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랬더라구요. 그래서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서 달라이라마 살고 계신 동네를 주변을 다니면서 구경을 했는데, 어디 가니까 그 벽화를 그렸는데 춤추는 호랑이를 그렸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데 갔다가 달라이라마께서 한국사람이 왔는데 한마디 하라고 해서 춤추는 호랑이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세상에 호랑이가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을 그린다는게 전세계 사람 중에 어디 흔하겠느냐고 그래가면서 이제 이야기를 했단 말이죠. 그랬더니 달라이라마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 종교도 설명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적성에 맞게 이야기 하면 되겠구나.’ 하면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게 옛날 양반들이 같은 호랑이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데 어디선 날카롭게 그려서 사람 협박을 하는 모습을 그린 데 비해서 우리 그림들은 의식으로 하는 거 외에 민간들이 만든 호랑이 치곤 웃지 않는 호랑이가 없어요. 겁을 주고 그런 게 없어요. 그런 걸 보면 호랑이를 앞세워서 겁을 주는 것은 나쁜 놈들 못 들어온다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암시 역할을 하는 구실로 선택이 된 거지만, 이쪽 사람들을 호랑이하고 같이 춤추면서 노는 오히려 호랑이하고 친하기 때문에 그 터에 산신과 가까워진 호랑이는 산신이라고도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긍지를 느끼도록 그렇게

습관화시켰단 말이죠. 그런걸 보면 한 터에서 어떻게 걸맞게 생활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걸 가르치느냐고 조상들이 애를 쓰시고 그것에 걸맞는 집을 짓느냐고 애를 쓰셨기 때문에 40일 가까이 비가 쏟아지는 장마가 지속되는 그런 시기에도 처마가 있기 때문에 끄덕 없는 그런 생활을 할 수가 있었죠. 만일 처마가 없어서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면, 비 맞고 다닐 수 없었겠죠. 생활공간이 안되겠죠. 또 비가 바람에 들이치면 대청 공간이 다 젖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에 비해서 처마가 길쭉한데 같은 목조 건물인데 일본식 처마도 한국 사람들이 가서 지은 건 넓고 깊고요. 중국도 다 그렇게 짓는데 중국식 처마는 다 좁죠. 이제 그것을 보면 기후에 맞춰서 지역의 특성에 맞춰서 어떤 집을 짓고 사느냐 하는게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지혜나 식견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처럼 앞이 탁 트인 대청을 만든 예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거든요. 그러면 남들이 잘못하면 ‘아 한국문화라는 것은 다 중국에서 본받아서 갖다 배운 것 아니냐’ 이렇게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막상 중국집과 우리집과 비교를 해보면 한국집과 중국집과 같이 생긴 게 한 채도 없잖아요? 이제 그것을 보면 이제 우리가 한문을 공부해서 그것을 가지고 동양 생활에 적응을 하는 그런 노력은 했지만 한식을 먹으면서 한복을 입고 한옥에 사는 개성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었다는 것을 염두해다두면, 한국의 문화라는 게 기반이 그런 바탕에서 시작이 되었겠구나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도자기를 보면 중국 도자기하고 한국 도자기하고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문화의 기반이 서로 이웃나라지만 엄격하게 다르다고 하는 것은 생활공간의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런거죠.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이 한자, 글자를 빌려다 쓰니까 아무래도 중국적인 문헌을 하고, 공자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한 건데, 지금 우리나라 학생들이 영어 공부도하고 독일어도 공부하고 외국나라말 공부를 많이 하잖아요? 그것은 배워가지고 나가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데 유용하게 쓰라 그런 뜻이나 마찬가지죠. 한국에서 생활에서 쓰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옛날에 한문 가르친 것도 결국은 식견,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바탕이지 그것을 생활에 쓰라는 뜻이 아니었단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사람들이 한국 집을 짓고, 한국식의 음식을 먹고 한국식의 복식을 입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은 방편일 뿐이지 생활 전체 지식이 거기에 몰두되라는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능한 게 아니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동양에 다니면서 여러나라하고 비교를 해보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보면, 완전히 생활 공간까지 중국화 된 곳이 있죠. 그러나 그것에 비해서 우리나라나 일본을 보면, 오히려 중국화 된 공간보다는 일본은 일본식의 한국사람은 한국식의 자기식의 집인 중국과는 다른 집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의복도 그렇죠. 의식주가 완전히 중국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필요에 의해서 지금은 양복을 입고 있죠. 그러나 집에 가서는 이 양복 보다는 편안한 한복을 입고 있는데, 편안한 한복이 왜 좋으냐 하면 바지도 넓으니까 아무데나 쭈그려 않기 쉽거든요. 의자에 앉을 때는 이게 좁아도 넓어도 관계없지만, 방바닥에 그냥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려면, 이게 좁으면 입은 바지 때문에 앉기가 거북해요. 그렇지만 이게 넓으면 아무 탈이 없죠. 이제 그런 것을 보면 생활공간에 맞는 의복을 어떻게 했겠느냐 하는 것을 염두해두고 한옥 공부를 해보니까. 전세계를 다니면서 한옥이야기를 해도 그게 가능해 지더라고요. 블란서 같은데 가서도 세느강 강가에다가 한옥을 하나 지었거든요? 그런데, 한옥의 특성은 지붕에 곡선이 있어서 이렇게 올라가죠? 서양의 건물은 다 이렇게 내려오는 곡선만 있지 올라가는 곡선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끝에 추녀가 걸린 그 부분을 앞에 처마보다 좀 올라가 있죠. 그런 것은 세계에서 좀 처럼 보기가 어려워요. 한국 사람들이 처마에 약간의 곡선을 두는 방법은 한복에서도 의복이 여기 소매가 높이 올라가거든요? 움직일 때 이게 덜렁거리지 않고, 행동하는데 쉽죠. 그런데 일본식 의복처럼 이렇게 하면 그게 안돼죠. 그걸 보면 어떻게 편리를 도모하는 방법까지를 고려하면서 자기 집을 지을 꺼냐 하는 지혜를 많이 발휘해서 함축시킨 것이 한옥이다. 그렇게 해도 지장이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한옥을 지을 때는 드나드는 방에 다가 창호지를 바르거든요? 근데 이 창호지랑 한지는 통풍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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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한지를 안 바르고 서양식 대로 문을 만들고 창을 만들어 달아 놓으면, 하루 종일 방안에서 담배 피는 사람이 있으면, 방 안 전체가 연기로 가득 찰 때가 있어요. 그럼 이제 창을 열어놔야죠. 근데 한지를 바른 방에서는 아무리 담배를 펴도 다 공기 빠져나가지 연기가 방안에 가득 차질 않거든요. 그게 숨통이 트인 구조다 그런 말이 생겨나는게 한지라는 게 그만큼 순환을 시켜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겨울철에 한국도 꽤 추운 지역이니까. 그 문을 활짝 열거나 창을 열어놓으면

추워서 못 견디는 경우가 있지만, 한지를 창을 하면 한 겹인데도 추위를 도입을 안해요. 막아주죠.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부족하니까. 한옥에서도 그것을 두겹, 세겹 창을 달거든요. 바깥 창, 안창해서 맨 안에다가 두껍더지 까지 발라서 밀폐시키는 경우가 있죠. 그러면 그 추운 겨울에도 그렇게 외부 공기 때문에 추워서 떨고 있을 염려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난방은 구들 들인 방에서 바닥만 뜨뜻할 뿐이지 내부에다가 가열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방이 뜨뜻한 이유가 공간을 밀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기 때문에 방의 공기가 바깥으로 많이 배출 되지 않으니까. 안이 뜨뜻한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지기 때문에 문을 열어놓지 않아도 좋은 것은 한지는 공기 소통이 되잖아요. 숨을 쉴 수가 있잖아요 닫아놔도, 그러니까 활짝 열지 않고 공기가 소통이 되니까. 이게 좋은거죠. 만일에 유리창 같은 것을 달아놨으면 열지 않으면 공기가 소통이 안될꺼 아니겠습니까? 그런 한지가 지니고 있는 특색을 아주 잘 활용한 것이 한옥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한옥이 지니고 있는 여러가지 구조물들이.. 그런데 이 한지를 안에다가 바르면 겨울에 덜 춥도록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두겹, 세겹 문이 있죠. 그렇게 하면 여기서 떠드는 소리가 밖에서 안들려요. 그러니까. 옛날 두껍더지도 그렇고, 안에다가 두겹, 세겹 문짝을 만들어 놓은 까닭이 바로 외부의 소통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에 그런건데, 여긴 사계절이 엄격하게 기온이 다르기 때문에 말이죠. 겨울에 그 무서운 추위를 이 얇은 창호지 한 장 발라서는 못 견디잖아요. 그거를 충분이 견딜 수 있도록 엄동설한에 몇 겹을 해서 차단을 시키죠. 그 무더운 여름도 그렇게 얇기 때문에 내부가 그렇게 뜨겁지 않게, 여름을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 한옥의 특성을 제가 외국 가서 지은 한옥에다가 발휘를 해보면, 외국사람들이 그렇게 신기해해요. ‘아 이렇게 냉방 시설 안해도 이렇게 시원하네?’ 그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남쪽에는 멕시코쪽에, 북쪽에는 노르웨이까지 가면서 수없이 많은 한옥을 지었는데, 세월이 꽤 많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집 헐었다는 이야기를 못 듣고 실제로 현장에 가보면 아직도 그 집들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신기해하고 이렇게 두드려 보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우리가 꼭 유리만 바른 유리창 보다는 유리창 안쪽에다 한지 바른 창호지를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걸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면서 조절을 하면 생활에 편의를 충분히 도모하 실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외국에 다니면서 느꼈어요.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한옥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서만 했으면, 이런 대화를 남한테 못 했을 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난 구라파로부터 시작해서 동남아뿐만 아니라 저 남미에 이르기 까지 한옥도 여러 개 지었기 때문에 한국식의 특성을 그대로 하면서 그 기후에 걸맞는 아까 창에다가 달아드리고 해서 비가 와도 유리창을 달았기 때문에 창호지가 찢어질 염려가 없잖아요. 그렇게 꼭 이중, 삼중으로 해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지금 세월이 30년이 지났는데, 가끔 편지를 하시면서 참 좋은 집 살고 있다고 칭찬을 가끔 들어요. 그리고 북극에서부터 남극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에 가서 일을 하는데, 동남아에서 지은 집도 그거 나무 가지고 마루 까는데, 마루 비가 와서 들이쳤는데도 다 터지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어떻게 잘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칭찬을 하시고요. 또 북극쪽에서도, 눈이와서 쌓였었는데, 터지지도 않고 잘 견디고 있다고 하시는데, 그건 저희가 그냥 마루만 쭉 까는 게 아니라 큰 마루 사이에다가 판자를 꼈기 때문에 큰 귀퉁이가 이렇게 붙잡고 있으니까. 마루 널판이 갈라진다던지 그런 염려가 없고,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그걸 못해요. 그걸 보면, 일본의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나 같은 사람 불러서 있으라고 하는 이유가 자기네 집이 지니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나를 통해서 배우려고 애쓰시더라고요. 중국 칭화대에서도 그렇고 일본에서 나라문화재에서도 그렇고 각 대학에서 나를 부르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오랜 세월 목조 건축을 지으면서 그 목조 건축이 어떻게 기후에 적응하느냐 하는 것을 충분히 고려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겠어요? 남쪽 지방하고 북쪽 지방은 각자의 지역에 따른 특성을 지니고 있죠. 한반도라는 것은 북쪽 기후와 남쪽 기후를 둘 다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둘 기후가 지닌 특성에 어울리는 집을 짓지 않으면 살림살이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삼국시대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 까지 그런 지혜가 축적 된 것은 바로 이 기역이 지니고 있는 특성에 적응하는 지혜를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내셨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내가 외국 가서 지은 집들이 이런 지역에 어떻게 이런 집들이 견디지? 그러시거든요. 남미나 북구라파 같은 데 지었을 때도 그 집이 무너졌기 때문에 와서 고쳐라 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은, 어떤 지역에 어떻게 기후에 맞도록 집을 지으면 되겠구나 하는 것을 우리 선조들이 참 많이 고민 하셨구나. 그래서 고구려 땅부터 시작해서 제주도에 이르기 까지 그 다양한 목조건물을 지으신 까닭이 바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지으신 거구나 하는 것을 아니까 다른 나라에 가서도 적응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공부를 하면서 우리 선조들이 오랜 시절 터득하고 쌓아놓은 것을 공부했다는 것이 나한테는 큰 보배 중에 보배죠. 그런 지혜가 어디있습니까? 아무 책에 봐도 그런 지혜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보면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오늘날에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내가 우리 학생들한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것을 듣고선 배워가지고 아 우리 조상들이 사시 던 것을 맞춰보니까 참 그런 특색이 잘 맞네요. 참 그것을 좋아하고, 그런데 지금 현대 건축만을 공부한 교수들은 아이들한테 그런 것을 못 가르친데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 서양식 건물 공부하면서 서양에 가서 공부도 하고 오신 교수들이 지으신 아파트에서 이상한 병이 돌아서 아이들이 한번 죽고 그런 일이 생긴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집 속에서 기후에서 오는 어떤 차이 때문에 생긴 병이 어떻게 해야 낫는지 우리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집을 기후에 걸맞게 생활에 걸맞게 짓는 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외국에서 집을 지으면서 그런 것을 고려해서 지었습니다 하면서 그 쪽 건축가들과 토론을 하면 그 쪽 건축가들이 그렇게 신기해하고 참 대단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보면 제가 조상님을 얼마나 잘 타고 났어요. 그리고 제가 인복이 많아서 우리 한옥 공부를 국립 박물관에서 시작했을 때 책상 위에서 글만 보고 배웠으면은 아마 그렇게 못 배웠을 꺼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 문화재 수리 일을 국립 박물관에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50년대 ,60년대에는 그랬어요. 그래서 서울에 남대문 고칠 때도 이 분도 거기 출신이니까 같이 작업을 할 수 있었거든요? 선생님 밑에서 조수 노릇을 했죠. 그런데 거기 선생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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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문화재 수리를 할 때 데리고 다니셨는데, 안동에 기와집들 그 많은 집들을 고치 실 때도 같이 데려가서 작업을 하셨는데, 또 호남 지방에 일을 하실 때도 데려가셨는데 “여기 이런 기후에선 이걸 이렇게 짓고 이게 다르지? 잘 재. 실축해.” 그래서 실축해서 도면을 그리라고 해서 제가 작업을 했고 그걸 가지고 ‘한국의 살림집’이라는 책도 하나 만들고 그랬어요. 이제 그러고 나니까 요새 이제 우리 한옥을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걸 보더니 ‘아이고 구조물이 이렇게 특색이 있군요. 그냥 우리가 사진만 찍었지 처마가 저렇게 나와가지고, 왜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이게 비가 들이치면 안되니까 각도를 다르게 해서 부연을 길게 빼고 그랬군요.’ 그런데 서까래와 부연이 각도가 다르거든요? 서까래는 이렇게 걸고, 부연은 이렇게 걸었죠. 이건 들어놓으니까. 바람이 들어오긴 쉬워요. 그 대신 비가 오는 것은 멀리 내쫒아 버리죠. 이렇게 쏟아져 떨어지게 이제 그것을 보면 우리 어른들의 지혜가 대단했던 게, 부연이 없이 서까래만 있으면 빗물이 바로 떨어져야 하잖아요. 부연이 있으니까. 처마 끝에 뭘 달아놓으면 한쪽으로 흘러서 저쪽으로 떨어지지 마당으로 떨어지지 않죠. 그러니까 옛날 양반들이 궁리가 많으셨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옛날에는 저거를 지금은 함석 가지고 처마를 했는데, 옛날에는 나무를 가지고 하셨어요. 나무를 잘라가지고 이렇게 한 부분을 거기다 달아놓으셨기 때문에 빗물이 쏟아지면, 그렇게 흘러 내려갔죠. 그러니까 마당에 눈이 쌓일 필요도 없고, 얼음이 거기서 떨어질 필요도 없고, 처마가 깊이 있고, 처마 끝에 다가 그런 홈통을 만들어 놓으셨으니까 가능 했던 일이죠. 그러나 오늘날에는 저렇게 함석으로 바꼈죠. 시대에 따라서 시류가 만들어내는 제품으로 어떻게 필요한 것을 완성해서 생활에 편안한 공간을 만드느냐 하는 궁리를 했는데 함석이니까 가벼우니까 다른 걸로 하는 것에 비해 길게 내뺄 수 있죠. 길게 내빼니까 처마 밑에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넓어졌죠, 그렇지 않으면 이런 툇마루가 옛날 같으면 못 만들죠. 옛날엔 툇마루가 좁았죠. 지금 처럼 길지 않죠. 그런걸 보면, 시대에 생활 수준이 어떻게 자기집에 작용을 하느냐 활용이 되느냐는 것을 이런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문짝에 서양은 유리를 달지만 우리는 그냥 창호지를 대는 것을 끝을 내지 않습니까? 창호지는 문을 열지 않아도 호흡이 통하죠? 한지가 공기를 통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죠. 한지라는 것이 저게 식물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것이라. 식물도 사이사이에 소통이 가능하니까. 한지에선 소통이 가능한 것 아니겠어요.그러니까 유리를 달지 않아도 저것만 달아놓아도, 외부에서 내려오는 찬 거를 막아주는 그런 구실까지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공기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한지를 저렇게 바르는데, 그런데 한지만 그냥 만들면 안되니까. 들어갈 수 있는 벽을 만들어 가지고 벽면 전체를 개방하지 않고, 일부만 개방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었죠. 그 바람에 이런 공간이 생기죠. 거기다가 세간도 갖다 놓을 수 있고, 아이들이 기어다녀도 깨지지 않을 것을 거기다가 갖다 놓고 그랬죠. 그래서 오래된 옛날 집들에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이 벽면 구성이라던지, 창호지 구성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벽면을 구성하지만, 옛날에는 벽하고 벽 사이에 문짝이 따로 있어서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벌어지게 되어 있었죠. 그러니까 갑자기 비가 오면 후다닥 가서 문을 다 닫을 수 있고, 눈이 오더라도 닫을 수 있고, 그러면서 누가 와서 찾으면 이렇게 내다 볼 수 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뒷마당에 이런 거 해놓고 나서 뭐가 어떤가 지금 공기가 어떻게 소통 되고 있고, 짐승이 어떻게 다니고 있나 하는 것을 내다볼 수가 있죠. 그런데 옛날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산골 마을에는 심지어 호랑이까지 나와 다녔거든요. 그러니까 그 호랑이가 다니는데 사람이 나서서 함부로 돌아다니다가는 공격을 받잖아요. 그러나 창을 열고 내다보는데, 이게 이렇게 높으니까. 쾅 하고 내다보면, 호랑이가 놀래서 그만 달아나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같은 생활공간이 필요해서 뭐를 만들면서도 자기 방어를 염두해다 두고 편의 시설을 만든 거지, 자기 방어는 무시하고 편의시설을 만들었으면, 저런 문이나 창이 안 만들어졌겠죠. 그리고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여름엔 덥고, 겨울엔 꽤 춥거든요. 그러니까 추운 북쪽에는 완벽하게 개방할 수 있는 시설은 안하죠. 그 대신 남쪽으로 여름에 시원한 공기가 들어올 수 있는 대청에는 찬 공기가 늘 드나들 수 있도록 했고, 북쪽 벽에는 이렇게 해서 창을 여닫을 수 있게 했고, 그것도 바깥 창은 비가 와도 괜찮고, 눈이 와도 괜찮도록 나무로 하고, 안쪽에는 창호지를 발라서 눈이 오면 바깥 창을 닫아서 막아줄수 있도록 그것을 보며 생활의 지혜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한옥을 통해서 선조들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벽채 같은 것도요. 그냥 벽돌만 가지고 쌓아진 집도 있지만 우리 같은 경우에는 중방을 들이고 거기 사이에 흙을 발라서 벽면을 구성하는 경우가 벽채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 벽채를 발라 놓으면 겨울에 기온을 차단해 주기 때문에 덜 춥죠. 그러면서도 벽채 사이에 공간을 활용해서 문을 거기다 달면, 바깥에다가 벽장을 만들 수 있어서 처마 끝에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그런 벽장을 툇간을 만들 수 있단 말이죠.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옛날에 생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으냐 하는 지혜를 참 많이 쓰셨구나.그렇게 볼 수가 있는데 뒤에 벽장을 만들어 달았는데, 밑에 가서 보면 비가 들이쳐서 비 맞을 만한 높이는 공간으로 비워놓고, 비가 벽에 부딪치지 않을 공간에만 벽채를 만들어서 벽장을 만들죠. 그것은 어떻게 적용을 해야 공간 활용이 유리하냐 고려를 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가옥이라는 게 바로 그런 지혜가 축적되는 게 아니냐, 하면서 세계 각국에 가서 집구경을 하고 다니니까 그 집 속에 함축되어있는 인간의 지혜로운 게 참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공부하고 나서 한옥을 살피니까. 한옥에 담긴 지혜 공간이라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데, 이런데도 말이죠. 대청에 이게 평천정을 만들면, 여기에 수십명이 앉았을 때 담배라도 피면 이 연기가 가득 차더라고요. 이게 이렇게 공간이 되니까. 공기가 소통이 되니까. 담배들을 피시면 공기가 다 빠져나가지 쌓이지가 않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면 옛날 양반들이 가족들이 수십명이 한 집안에서 사는 경우도 있지만, 각 집에 살다가 행사 때 대청에 수십명이 모이는데도, 담배를 피고 그래도 끄덕 없는 게 이런 구조를 해놨기 때문에 그게 합리적으로 해결이 되는 구나 하는 걸 깨달을 수 있었는데, 저희 고향에 집만해도 대청이 백평이 넘었어요. 많은 손님들이 오셔가지고 잔치하는 날은 어떤 때는 200명씩 모여 앉을 때도 있고 그랬어요. 어른들이 거기 모여서 담배를 근데 지금은 골연을 피지만 옛날에 긴 담배를 가지고 피실 때는 굉장히 독했잖아요? 그거 안 피시는 분이 없을 정도로 앉으셔셔 피시는 대도 그것 때문에 기침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어요. 그만큼 공기가 잘 소통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처마나 천정의 구조가 그냥 평면으로만 해놓은데 비해서 공기 소통에 효과적인 구조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굳이 뭐 환풍기를 달지 않아도 그 수십명이 와서 담배를 피셔도 환풍기가 없어도 되는 게 뒤에 창문이 있어서 바깥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어서 가능한 게 아니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한옥을 보면, 한옥에 어떤 성격 중에 한 사람 두 사람을 집을 짓는 것을 위주로 하는게 아니라. 수십명 수백명이 앉아서 잔치를 하고 가도록 아무 뒤탈이 없을 정도로 적응 될 수 있도록 지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근데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한옥을 지으면서 한옥에 대한 설명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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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외국에 가서 한옥을 지으면서 한옥에 대한 설명을 하면 ‘그거 나도 가서 담배 한 대 피면서 생활하고’ 이런 외국인들이 오히려 내가 한국집에 와서들 즐기면서 대화도 하시면서 잔치도 거기서 하고 뚱땅 거리면서 춤도 추시고 그걸 보면은요. 우리 한옥 공간이 오히려 활용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대청하고, 대청 저 위에 큰 방이 있어서 한쪽 안방은 여자용이고 건넌방은 남자방 아니에요? 그러니까 의복을 갈아입을래도 거기는 거기대로 여기는 여기대로 갈아입고, 또 뚱땅거리고 또 가실 때는 또 각자 갈아입고 가시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 활용을 위해서 그런 공간을 마루 위에다가 그런 것을 설치하셨고, 대청 넓은 것은 넓이가 30평 40평까지 있거든요. 연경당만 봐도 그게 40평이나 되요. 그러니까 들어가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공간에 100여명이상 들어가 앉으실 수 있거든요. 연경당 같은 건 한 200명 들어갈 수 있어요. 그만큼 대청이 넓거든요? 그런걸 보면 옛날에 시골에 가면


종갓댁 본갓댁 하는데, 대청을 넓게 하는 이유가 많은 분이 모여서 뭘 하실 수 있도록 구조를 하신 거구나. 그런데 그렇게 넓은 것을 해놓고 나니까. 유지, 관리하는데 어렵지 않을까 그게 그렇게 별 그렇게 문제가 없더라구요. 마루는 걸레질만 하면 청소가 되는거 아녜요? 그리고 우리 벽은 아이들이 와서 뜯고 하면 창호지 1년에 한번씩 봄, 가을로 갈아 붙이잖아요? 유지, 관리가 쉬워요. 그런데다가 한지 안쪽 에다가 또 벽 덧문 같은 걸 만들고 하니까 여기서 소리지른 게, 안까지 안 가거든요. 안채에서 대청에서 떠들어도 안방에 할머니들 이렇게 앉아계시고, 그렇게 시끄럽지 않으니까. 견디시는 거죠. 그런걸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천연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하는 지혜가 저렇게 작용하는 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는데, 가 일본에 나라문화재에 있을 때 일본 사람이 자기 집에 와서 창 만든 것을 봐달라고 해서 가서 봤더니 아 거기서는 여기서 떠든 게 옆에서 다 들려요. 그럴 게 아니라 위에 천장 부분을 너무 나무만 가지고 하지 말고 여기다가 흙을 좀 발라보면 어떠냐. 그래가지고, 했더니 그러니까 안들려요 사람 소리가. 반응이 안 생기니까. 그러니까 흙은 남의 소리를 빼고 먹어버리지. 방음장치를 잘 안하잖아요. 그런데 나무를 발라 놓으면 올라가면 바로 튀어 나오죠? 그게 그렇게 다르더라고요. 그것을 염두해 두고, 일본에 가서 한번 해보자고 해서 몇 번 했더니, 아 그만 그게 유행이 되버렸어요. 마루 위에 있는 천장에 있는 나무를 다 뜯고 흙을 바르더라고요. 근데 흙을 바르니까. 흰색하고 나무는 나무색이 나니까. 그 변화가 있잖아요? 그렇게 변화가 있으니까 벌레가 들끓는데요. 새들이 와서도 하얀 데는 잘 안 가잖아요. 그걸 보면, 흰색을 가지고 왜 발랐을까? 처음엔 잘 몰랐는데, 그런 경험을 하신 분들 말씀을 듣고 실제로 시골에 가서 해 보니까. 그냥 진흙만 발랐을 때는 벌레들이 달려들더니, 회를 싹 발라놨더니 안 와요. 그 석회라고 하는 회에 시멘트에도 독이 있듯이 석회에도 날카로운 독이 있어서 짐승을 쫓는 성향이 담겨져 있거든요. 그러니까 벌레들이 저기는 뚫고 못 들어가죠. 그러니까 시멘트를 바른 거나. 석회를 바른거나, 회를 바르거나 하는 것은 벌레들이 달려들기 어렵다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니까. 우리가 옛날처럼 서까래하고 서까래 사이에다가 다시 회를 발라서 마감하는 그 항토법을 무시하기 않고 지금도 새로 짓는 집에다가도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강화 학사제’라고 강화에다가 한옥을 하나 지었어요. 그런데 그 집 주인은 미국에서 지금 사업을 하는 분인데, 지난 번에 아이 결혼식을 거기 와서 했어요. 그 집에 그 한옥에 와서. 그런데 그 때 그 처가 어르신들도 다 오셨거든요. 미국에서 어렸을 적부터 살았기 때문에 그런 집을 처음 보셨대요. ‘아 이런 집이 다 있으냐’고 그런데 떠들고 웃고 그러셔도 반응이 없으니까 소리가 먹어버리고 반응이 안 오니까. 그냥 쉽게 이야기들 하셔도 괜찮다고 아 이렇게 즐거운데가 있느냐고, 우리 미국에 와서 집 하나 지어달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런걸 보면, 그래서 미국가서 집을 하나 지었죠. 거기 멕시코 쪽에도 집을 하나 지었고 몇 군데 했는데, 그런 걸 보면은 ‘어렸을 때 우리 한옥에서 살 때 어땠잖아.’ 그런 인식이 있으니까 그런 호기심을 일깨우는 게 아니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자라난 자기 집에 대한 그런 관습이 생각이 나이 먹어서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 아 그거!’ 하고 관심을 갖고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는 구나 하는 것을 그 때 처음 느꼈어요. 그래서 지금 외국 가서 지은 집 중에 ‘중간에 헐어버렸어’ 하는 집이 하나도 없어요. 전세계 돌아다녀도중간에 헐어버렸다 하는 집이 하나도 없어요. 비가 저렇게 많이 오는 지역인데도 어떻게 유지를 잘 하시는지 아무 탈 없이 보존을 하고 계시거든요. 제가 가끔 몇 년에 한번씩 한바퀴 돌아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가서 고쳐드릴려고, ‘아 그 놈의 집 헐어버렸어’ 하는 분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 것을 보면은 한옥이라는 것은 그 고장 특성에 그 기후에 얼마나 적응을 잘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가서 보면 깨닫게 되더라구요. 역시 천연스런 건축자재만 가지고 지은 집은 지역적 특성에 참 적응을 잘하는 구나 그런 생각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한옥을 지으면서 절대로 시멘트 안 써요. 시멘트는 습기를 빨아들이는 그런 성향이 있잖아요? 그래서 외국에 다니면서 많은 집을 지었는데, 시멘트 거의 안 썼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멘트를 좀 썼더니 어떻다 하는 소리를 나중에 들었는데, 그 지역적인 특성에 걸맞는 집을 지어야 오래가지, 지역은 상관없이 자기가 배운대로 지으니까. 역시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외국도 한옥을 지으니까. 여기서 배운대로 고대로 지으려하지말고, 블란서에서 집을 지을 때, 블란서 건축가들과 상의를 해서 거기에 맞는 통풍을 염두해 두고 한옥을 지었거든요. 그래서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에 흙을 바른 게 아니라, 나무를 깔았어요. 그러니까 세느강에서 오는 습기가 시멘트 같으면 빨아들이고, 흙 같으면 빨아들일 텐데 나무는 해 놓으니까 빨아 들이지 않으니까. 지금 몇 십년이 되도 아직도 끄덕없어요. 그러니까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해서 집을 지어야 겠다는 생각이 절실하더라고요. 우리 선조들이 외국에 가서도 근데 멕시코 집도 아무 탈없이 견디고 있는 걸 보니까 말이죠. 거기는 거기 기후에 맞게 집을 지었으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 걸 볼 때도 멕시코에 가서 우리 도편수 양반이 자기 스타일 대로 지은 게 아니라 교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기 기후는 어떻고, 자기 집이 어떻고, 여기는 이렇게 하자 하면서 바꾸시거든요? 그게 잘 적응이 되서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크고 좋은 세월을 지내고 있는데, 남미에

정자를 하나 지었을 때 뭐를 겁을 냈느냐 하면, 옆에 바로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벌레가 그렇게 많대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나무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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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크고 좋은 세월을 지내고 있는데, 남미에 정자를 하나 지었을 때 뭐를 겁을 냈느냐 하면, 옆에 바로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벌레가 그렇게 많대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나무마다 다 들어가서 다 집 짓고 살고 있다고 그렇게 걱정을 해요. 그래서 우리 도편수 양반이 저걸 다 나무에 구웠어요. 구우니까. 표면이 향 나무가 아니라 구운 나무가 되버렸잖아요. 그러고 나서 겉만 문질러서 까만 것만 없애고 나서 나뭇결을 하니까. 나무도 불이 들어갔으니까. 지져졌잖아요. 그러니까 거기는 벌레가 붙질 못한대요. 붙어봐야 그 나무에 빨아먹을 게 없으니까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걸 보면, 옛날 양반들이 참 지혜로우셨던 것 같아요. 그런 데 하나 놀라운 게 교토, 나라에서 나를 오라고 해서 갔을 때 나라 유명한 절에다가 행랑채를 하나 짓고 싶은데, 스님들 모여앉아서 공부하는 행랑채를 하나 짓고 싶은데, 여기서 목조건축 하는 사람보다 여기는 한국식으로 한번 짓고 싶으니까 하나 지어달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 도편수 양반을 모시고 여기서 나무를 가지고 가서 하나 지어드렸거든요? 지금도 가끔 편지도 오고 전화도 오고 있는데, 아 이게 지금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끄덕 없이 아무탈 없이 견디는 걸 보면 하도 신기해서 도대체 비결이 뭔지 알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해요. 왜냐하면 그 옆에 또 하나 집을 하나 더 짓고 싶은데, 바쁜 사람 부르는 거 보단 자기네끼리 짓고 싶어서 그러니까 우리 교포 불러다가 지을 테니까. 그 비결을 알려달라고 전화를 해요. 그런데 그 전화를 받으면서 나무결을 잘 다듬고 나무에 짐승이 덤벼들지 않도록 쇳불을 지져가지고 포장을 해서 갖다놓으면, 되니까 해보라고, 얼마 있다가 전화가 와서 지진대로 지었더니, 시꺼멓게 지어져서 맨 껌댕이라 숯집처럼 되버려서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견디느냐 이거에요.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 어른들은 그것을 숯에다 대고 불태워서 지진게 아니라, 쇠불에다가 지져다지고 고걸로 한번 다려주거든요. 다려주니까. 나무 표면이 상해서 사라질 염려는 없잖아요? 그런대도 지졌으니까. 벌레가 더운 기운에 다 죽었을 뿐이아니라. 집이 다 녹아서 없어져 버렸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갖다 놓아도 벌레가 생기지 않거든요. 그리고 잘 지은 집은 나무가 저렇게 터지지 않아요. 원목 고대로 그러니까 그걸 잘 칠해가지고 해놓으면, 어떻게 나무가 이쁜 살결을 고대로 지니고 있느냐고 신기하다고 그러거든요. 그것을 보면은 어떻게 해야 나무가 원상을 잘 지니고 견딜 수 있는데 그 기후에 따라서 어떻게 적응이 되느냐 하는 거를 우리 선조들이 잘 터득해서 오랜 세월 해오셨으니까. 우리가 배운거지 우리가 책상 위에서 그걸 어떻게 배우겠어요. 어림도 없지. 근데 우리 도편수 양반이 남대문 고치실 때도 나무를 “야 가지고 가자, 그리고 강원도로 날 데리고 가셔서 저기 저거 조금 베어라” 해서 베어가지고 내려갈 때 압록강에서 한강 내내 거기서부터 뗏목을 만들어서 물에다 띄워서 끌고 내려오시더라고요. 그런데, 아 그 저수지가 만들고 이게 생겼으니까. 어떡하냔말이죠. 그러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쓱 건지시더니 그걸 지나가지고 다시 배에다 실고 또 끌고 내려오시더라고, 또 오면서 세번을 해체를 했다가 한강까지 끌고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제재소 갖다줬는데, 제재소에서 아 이 나무는 벌레 한마리도 없네 그러시는 거에요. 물 속에서 잠겨왔으니까. 벌레가 살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런 걸 보면, 옛날 양반들이 뗏목을 타고 노래를 부르고 흘러 내려오셨다고 하는 게 뭐 그러려는 했는데, 목재 운반 방법이 그 옛날이 통나무 그 긴 것을 옛날에 그 큰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그 무슨 수로 차에다 실어 옮겼겠어요. 천상 물로, 수륙으로 밖에 올 수 없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물속에서 잠겨져 오니까 오면서 벌레는 다 죽었죠. 그러니까 경복궁에 그 경회루 같은 엄청난 건물이 몇 백년이 되도록 탈없이 저렇게 견디고 있는게 그런 물 속에서 벌레가 다 없어졌기 때문에 완전히 소독이 됐으니까. 가능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 보면,단청을 했기 때문에 그랬겠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궁에도 단청 안하고 향나무로 그냥 쓰는 침전이 몇 개 있죠? 침전 건물가서 봐도 지금 몇 백년이 되도 썩지 않고 견디고 끄덕하니 남아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수리하면서 보충하라고 해서 뭣도 모르고 몇사람이 했는데, 우리 도편수 양반이 “저런 미친 놈들 저렇게 하면 썩는다.”하고 야단을 치시는데 처음에 상대들이 못 알아듣더니 3년쯤 지나니까. 완전히 곰팡이가 쓸기 시작해요. 그걸 목재를 어떻게 다듬어서 어떻게 다듬어진 소나무를 써야 오래 탈없이 사는 구나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한 집하고 그걸 모르고 한 사람의 집하고 그렇게 다르더라고요. 그러니 우리가 그 다음에 문화재 수리 할 때는 일반 낯선 목수는 절대로 쓰지 않았어요. 했다가 얼마 안 되서 고장 나면 그건 어떻게 하냐구요. 특히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이 창덕궁 같이 목재에 칠 절대로


하지 않고 임금님 침전을 짓는 곳을 우리가 보수를 할 때 그 목재에 다가 약칠을 하면 어떻게 할꺼냔 말이죠. 그래서 옛날 방식대로 우리 도편수 양반 모시고 했더니, 지금도 아무 끄덕 없어요. 그래서 그걸 보면 오랜 세월 동안의 경험이 그게 전수되어 왔기 때문에 도편수한테 이어져내려온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번에 도편수가 돌아가신 후에 젊은 사람 하나를 도편수로 키우시다가 아 그 놈이 교통사고로 그만 죽어버렸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니까 지금은 옛날 우리 어르신이 하시던 거를 고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요새 몇 사람 젊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걸 보면, 그 때 조수로 멀리서 배우던 애들 그 때 애들이 지금 하고 있는데, 걔네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한 애예요. 그러니까 걔네들이 한 집은 지금 몇 십년이 지나도 끄덕없이 견디거든. 그러니까 강화에 ‘학사제’ 같은 거 하나 지었을 때 처음에는 어쩌구 저쩌구 했는데, 아 이거 십년이 되도 아무 탈이 없으니까 구경 온 사람이 그렇게 신기해해요. 그러니까 그런 걸 보면, 이 땅에는 이 땅에 걸맞는 지혜가 존재하는 거지 꼭 외국에서 배워온 거를 고대로만 써야 된다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거를 나도 깨닫게 된 거죠. 그러니까 선조들의 지혜를 고맙게 배운 것에 대해 인사하는데, 우리 시골에 다녀보면, 큰 법당을 옛날 방식 그대로 지은 집들이 지금도 몇 채 있어요. 그런데 중간에 수리를 하면서 뭣도 모르고 현대식으로 갖다 수리를 했는데, 얼마 안 가서 썩어버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약칠도 하고 다 했는데 왜 썩었느냐고, 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옛날 멀쩡한 것들은 다 자기 생긴 대로 위치에 따라서 자기를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에요. 근데 무슨 색을 칠했느니 어땠느니 할 때 그 적응이 잘 안되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에요. 꼭 거기는 벌레가 몰려들고, 기후에 따라 변화가 생겨요. 그래서 그것을 보면, 건축물이라는 것은 지혜롭게 걸맞게 짓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게, 하긴 조선왕조시대에 지은 집에 지금 같은 그런 방부제가 어디 있었겠어요. 현대적인 약품을 칠해놨기 때문에 몇 백년 간 거 아닐꺼 아니에요. 지금 무량수전 600,700년 넘었잖아요. 아직도 그 큰 건물이 견디는 것은 목재가 벌레가 덤비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지난 번에 서까래 몇 개 간다고 새로 일 맡은 녀석이 뭣도 모르고 향나무를 갖다 쓰더라고요. 그래서 ‘임마 왜이래’ 했더니 돈을 이거 밖에 안 주니까. 그런다고 그래요. 그래서 ‘야 그럼 여기 벌레가 끼면 주변에 것은 어쩌라는 거야’ 그랬더니, ‘아 그런가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하길래 ‘빨리 다 철수해’ 했죠. 그리곤 우리 도편수 양반 모셔다가 이걸 목재를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옛날 방식대로 다뤄서 낄 수 있게 해 그래서 그게 뭐 어려우냐 해서 옛날 방식대로 해서 했죠. 지금 몇 년 되도 아무탈이 없어요. 그래서 그걸 보면, 우리 한옥을 하는데 목수들은 옛날 법도 그대로 배운 양반을 모셔다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돼. 그리고 자꾸 그런 걸 제한을 두려고 노력을 하는 이유가 몇 군데서 경험을 하고 나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가서 하는 거 하고 아는 사람이 가서 하는 거 하고, 이렇게 차이가 있구나 하는 실상이 드러나는 거죠.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렇게 실제가, 배우지 못한 게 나타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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